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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묻은 김칫국물 -손택수

by Olivia Ha 2011. 11. 27.



점심으로 라면을 먹다
모처럼만에 입은
흰 와이셔츠
가슴팍에
김칫국물이 묻었다
난처하게 그걸 잠시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평소에 소원하던 사람이
꾸벅, 인사를 하고 간다
김칫국물을 보느라
숙인 고개를
인사로 알았던 모양
살다보면 김칫국물이 다
가슴을 들여다보게 하는구나
오만하게 곧추선 머리를
푹 숙이게 하는구나
사람이 좀 허술해 보이면 어떠냐
가끔은 민망한 김칫국물 한두 방울쯤
가슴에 슬쩍 묻혀나 볼 일이





시인은 셔츠에 묻은 얼룩을 보면서 아,  조금만 조심할 것을……하며 후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때 마침 앞에서 오던 사람이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줄 알고 꾸벅 인사를 하고 갑니다.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사람도 아닌데 먼저 인사를 받았으니 그로서도 좀 난감하긴 했을 테죠.  무심결에 인사를 맞받아 하고 
머쓱하게 지나쳐 갑니다. 
너무나도 사소하며 우주적 관점에서 봤을 때 먼지 한 조각이 1mm를 움직인 것만큼도 의미가 없는 사건이 
시인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여 자신의 삶이 타인의 삶보다 의미 있는 것이라고 약간의 자
긍심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상에 김칫국물 하나가 자신의 가슴팍에 갑자기 나타나 고개를 숙이게 했
던 것입니다.  아무리 꼼꼼히 일기를 쓰는 사람도 그냥 지나치기 쉬운 사소한 사건에 시인의 눈이 멈췄습니다. 
꼿꼿했던 고개를 숙이게 만든 이 작은 얼룩 하나.
 
‘지르잡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어사전에는 ‘옷 따위에서 더러운 것이 묻은 부분만을 걷어쥐고 빨다’라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옷에 음식 얼룩이 묻거나 이불 한 부분이 더럽혀졌을 때 그곳만 세탁하는 일을 뜻하는 우
리말입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삶이란 ‘지르잡는’ 일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슴에 묻은 김칫국물’로 인해
시인은 자신의 삶 가운데 지르잡아야 할 부분을 깨닫습니다.  좀 허술해 보여도 자신만큼 타인과의 관계도 소
중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것이죠.  삶을 통째로 바꾸는 계기라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나씩 지르잡고 고치고 새롭게 하고,  다시 또 지르잡고 새롭게 하는 그 과정이 곧 삶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문학이 한 인생을 통째로 바꾸지는 못할 것입니다.  어떤 위인전기도,  자기개발서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
만 손택수 시인의 시처럼 이 작은 발견이 한 인생의 한 부분을 지르잡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 지점에서 일
어난 작은 변화가 또 다른 변화로 이어져 삶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부터 가슴까지의 거리라고 합니다.  머리로 안 것을 가슴으로 느끼는 게 그
만큼 어렵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것보다 더 먼 길은?  가슴에서 다리까지의 거리입니다.  가슴으로 느낀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게 더 힘들다는 뜻입니다. 
시는 시인의 눈에서 태어나 읽는 사람의 눈으로 들어가서 가슴을 거쳐 다리까지 가는 힘이 있습니다.  좋은
시는 그렇습니다.  개미가 빵 가루 하나를 물고 가다가 잠시 그것을 떨어뜨리는 것만큼이나 사소한 현상을 통
해 삶을 관통하는 실마리를 찾아냈고 시인은 그것을 담담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삶의 작은 부분을 바라보는 눈을 떠보세요.  광야에 외치는 소리보다는 때론 문풍지 작은 구멍을 드나드는 바람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법이니까요.  아스팔트를 뚫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잠을 잘 수는 있지만 작디 작은 모깃소리에는 결국 잠을 깨고 마는 법이니까요.
[오늘의 북멘토  ] 윤성학  |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