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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글픈 엑스트라다

by Olivia Ha 2011. 11. 15.
나는 엑스트라 노동자다. 20년 넘게 드라마, 영화에서 주연들의 배경이었다.

지나가는 행인과 거지, 가정부와 궁녀, 시장에서 생선 파는 아줌마와 싸움하는 여자, 그게 화면 속 나였다. 더러운 분장을 하고, 누더기 옷을 입어도, 그게 내가 먹고사는 방식이었다.

남들이 비웃는 그 조그만 역할을 따기 위해 나는 매월 상부에 5만원을 상납했다. 하지만 이제는 비굴하게 살고 싶지 않다.

“엑스트라도 로비 해야 먹고살지. 서글퍼.” 

우습겠지. 매월 5만원의 상납, 아무것도 아니라 웃을지도 몰라. 몇 천, 몇 억원씩 도둑질해야 신문에 기사 나잖아. 그래도 기자 아가씨, 내 이야기 좀 들어봐. 세상엔 큰 도둑도 있지만 작은 도둑도 득실득실 대거든. 5만원도 내겐 큰 돈인데 그걸 내지 않으면 100만원을 벌 수 없어.

이 바닥이 원래 더러워. 엑스트라에게도 기획사란 게 있는데 촬영 현장에서 엑스트라를 지휘하는 반장과 일을 배분하는 지부장에게 잘 보이지 않으면 역할을 많이 딸 수 없어. 나처럼 매달 납부하면 한 달에 15∼20회 출연해 100만원쯤 벌고, 안 그럼 10만∼20만원쯤 벌지.

이 바닥 생활 20년이야. 돈 준 사람, 안 준 사람, 다 알지. 여자 엑스트라가 한 달에 100만원 이상 번다? 돈 먹인 거지. 지부장만 먹여도 안 돼. 현장 반장한테도 먹여야지. 커피든, 술이든, 돈이든. 엑스트라 인생도 로비를 해야 매상이 올라가. 서글프지. 지금 돌이켜보면 내 살을 내가 깎아 먹었어.

돈 넣으면 즉각 약발이 와. 송금했다고 문자 보내면 지부장한테서 답문이 와. ‘몇 날, 몇 시, 어디서 어떤 복장으로 엑스트라 집결.’ 남들도 바치니까, 나도 그렇게 사는 게 맞는 줄 알았어. 엑스트라는 넘쳐나고 현장은 한정됐는데, 일 줄지 말지 결정하는 건 기획사거든. 탤런트들이야 인기 많으면 PD들이 불러주고, 없으면 안 부르지만 우리 세계에 그런 게 어딨어? 연기 잘하는 엑스트라, 연기 못하는 엑스트라로 구분이 딱딱 돼? 그래서 돈 바치는 엑스트라, 안 바치는 엑스트라로 나눠지는 거야.

많고 많은 직업 중에 왜 하필 엑스트라 하냐고 묻곤 하지. 처음 시작한 이유는 하나, 안 죽고 살려고. 나랑 엄마, 내 아들 이렇게 셋이서 살았어. 근데 20여년 전에 어머니가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돌아가셨어. 그때 소주라는 걸 처음 알았지. 지금은 담배랑 커피가 내 친구. 아들 장가가고 혼자 살아. 잠깐 담배 좀 태워도 돼?

아, 이것 봐. 벌써 엄마 얘기만 해도 눈물 나. 그때 충격 받아서 생리도 끊기고, 텔레비전에서 병원만 봐도 눈물이 났어. 1년간 우리 집 마당에도 안 나가고, 은둔 생활했는데 얼굴에 딱지 생기고 삐쩍 마르고. 이러다 죽겠다 싶었어. 하루는 우리 동네 한 아저씨가 나한테 전화를 넣었어. 충무로에서 엑스트라 동원하는 분인데 출연하면 돈 준다면서. 안 죽으려고 나갔고 그러다 이 바닥에서 20년 일했어.

엑스트라 인생이 뭔지 알아? 주연보다 튀면 ‘뒤지게’ 욕먹는 거. 배우가 검정 옷 입으면 우리는 딴 색 옷 입어. 슬프고 처량한 마음이 들 때가 왜 없겠어? 여름에 냄새나는 옷 입으면 집에 와도 몸이 가려워. 그래도 자부심은 있어. 말이 엑스트라지 우리도 연기하는 사람들이야. 더러워도 이 일 하는 건, 내 적성에 맞아서. 연출진 눈빛만 봐도 이젠 알지. 남들이 나보고 감각이 빠르대. 카메라발도 잘 받고.

이제껏 나온 드라마 편수? 그걸 어떻게 다 세겠어. 수백 편 되겠지. 가만 있어 보자. 출연 목록 공책 좀 가져와 볼게. 아, 여기 적혀 있네. 명성왕후, 김수로, 성균관 스캔들, TV 문학관, 불굴의 며느리, 서울 1945, 대물, 짝패, 싸인, 괜찮아 아빠 딸, 욕망의 불꽃, 김만덕, 강력반, 제중원, 검사 프린세스, 신기생뎐, 내마음이 들리니, 최고의 사랑, 남자를 믿었네, 웃어라 동해야, 야망, 마이더스, 무사 백동수… 대한민국 웬만한 드라마 다 했네.

역할? 주민, 행인, 상인 뭐 이런 건데. 그래도 나는 베테랑이니까 역할이 좀 다르지. 주로 시바이 치는 거. 시바이가 뭐냐고? 초짜들은 못 하는 거. 연기를 해야 하는 힘든 장면에는 베테랑 엑스트라가 나가. 주연끼리 싸울 때 싸움을 뜯어말리는 행인이나, 기자회견에서 웅성거리는 사람이거나.

대사 치면 돈 더 주냐고? 아니, 전혀. 시바이 치면 원래 일당이 9만3000원이야. 방송국이랑 기획사랑 그렇게 계약을 해. 하지만 단 한번도 9만3000원 받은 적 없어. 초보 엑스트라랑 똑같이 일당 4만2000원 받지. 회사가 돈 떼먹는지, 현장 반장이 떼먹는지, 나도 몰라. 20년 전에도 2만원 받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돈은 거의 같아.

단역이나 조연 배우를 아주 잠깐 꿈꿨지. 한 드라마에 가정부로 고정 출연한 적도 있어. 근데 단역이 더 궁핍해. 엑스트라는 단체 버스 타고, 단체 숙식 하지. 단역 배우는 혼자 현장 가서 자기가 알아서 자야 돼. 돈도 드라마 거의 끝날 때 주고, 출연 기회도 더 없어. 사람은 주제 파악을 빨리 해야지. 배우들은 학교 나오고, 암기 잘하고, 공채 출신이 많잖아. ‘나는 여기까지다’ 그걸 알아야지. 안 그럼 서글퍼서 일 못해. 20년 일해도 더는 올라갈 수 없는 거, 그게 이 세계야.

“눈 감고 사는 거, 세상 사는 법 아냐?” 

대형 엑스트라 기획사가 서너 곳 있는데 나는 그중에서 T기획사 일을 많이 했어. T기획사의 5지부장인 권모(여)씨 소속으로 10년 넘게 일했지. 초기에는 만날 때 손에 돈 쥐어주거나 사무실 책상에 올려놨는데 민망하더라고. 그래서 2007년부터 3년간 따박따박 매월 온라인으로 5만원 줬지. 100만원 버는 사람한테서 5만원 떼먹는 거, 애한테 묻은 밥풀때기 훔치는 거야.

근데 작년부터 점점 약발이 안 받아. 내 나이가 육십이야. 이 위치에선 줘도 그만, 안 줘도 그만이지. 드라마에서 쓰이는 용도가 적단 말이지. 그래서 돈 안 줬어. 그러니 일을 더 안 주더라고. 그래서 9지부로 옮긴다고 했어. 그때부터 사이가 조금씩 틀어졌지.

하루는 지부장 말고 촬영 현장 반장이 나한테 오라고, 직접 일을 줘서 나갔지. 반장이 나한테 이래. “언니 불러 달라고 사무실에 말했는데 회사에서 안 된다대요.” 알아봤더니 5지부장이 내가 다른 지부로 옮긴 뒤 괘씸해선지 일 못 나가게 회사에 손을 써 놓은 거야. 5지부장이 다른 지부장보다 힘이 세. 제일 언니지. 한 지부에 엑스트라 200∼300명씩 데리고 있는데, 5지부에 베테랑 엑스트라가 제일 많아. 회사 입장에서도 무시 못 할 지부지.

화가 나는 거야. 그래서 상납한 거 회사 전무, 이사한테 알렸어. 근데 이 놈들 반응이 없어. 보조출연자(엑스트라) 노조위원장이 T기획사 회장을 찾아갔지. “우리 회사는 직원이 고스톱을 하거나 (신용)카드 돌려 막기를 해도 자른다. 이런 일은 잘 처리하겠다.” 회장 말을 믿고 15일을 기다려도 연락이 없어.

그래서 다시 이사한테 전화를 했지. “그건 회사랑 아무 관련이 없고, 준 사람과 받은 사람 사이의 문제일 뿐이다.” 이 놈이 이렇게 말해. 이후에 이사를 만났어. 이사가 날 보자마자 뭐라는지 알아?

“돈 필요하세요?” 그게 첫마디였어. 내게도 자존심이란 게 있어. 돈 때문에 그런 거 아냐. 인간적인 배신감 때문이지. 돈 상납한 나도 물론 잘못했지. 하지만 그 일로 T기획사를 그만뒀어. 근데 도둑질한 놈은 버젓이 회사 다니잖아. 앞으로 잘 지내자고 했지만 거절했지. 미쳤어? 나, 바보 아냐. ‘통밥’이 딱 보이잖아. 또 뒤통수칠 놈들인데.

기획사 회장님이란 사람이 그럴 수 있어? 5지부장이 뭐라고, 그 하찮은 일 하나 처리 못해? 솔직히 회장님은 존경했어. 높고 높은, 많이 배운 분이니까. 서울대 나오고 성우 출신이라던데. 나 같은 하류 인생과 다른 고귀한 분이라 생각했어. 근데 지금 보니 회장과 내가 다를 게 뭐야? 존경? 그런 건 갖다 버렸어.

5지부장, 옛날에 못된 짓 많이 했어. 엑스트라한테 접근해서 돈 얼마나 많이 꾸는데. 말이 빌려 달라는 거지, 나중에 안 갚아줘. 돌려 달라면 일을 안 줘. 나처럼 성질 더러운 년한테 이 정도로 대접하면 신삥한텐 더 한다고 봐야지. 솔직히 젊은 엑스트라들, 걔네들 당하는 거 많이 봤는데 모른 척 했어. 내 일 아니라고.

그래서 지난달 19일에 영등포경찰서에 진정서랑 입금 내역 제출했어. 법대로 처리해 달라고. 상납한 거 까발릴까, 말까, 조그만 내 머리로 한 달간 잠도 못 자고 고민했어. 그래서 겨우 터뜨렸는데 누구도 눈 하나 깜짝 안 해. 나만 바보 됐어. 비열한, 비굴한 세상이야. 그래도 이젠 상납 같은 거 안 하고 당당하게 살 거야. 가게 전단지 돌리는 아르바이트 해도 괜찮아.

정당한 수당 달라는 요구는 왜 못했냐고? 그럼 잘리는데, 당신 같으면 따지겠어? 옛날에 H기획사에 임금 갖고 따졌다가 1주일 정지 먹었잖아. 한두 번 따져 봤지만 바뀌는 건 없고, 일을 못 받았지. 그 뒤론 입 있어도 닫고, 눈 있어도 감아 버렸어. ‘가만히 있어야 일을 나가는 구나’ 터득했지. 세상 사람들 다 그렇잖아. 다들 그렇게 살잖아.

잠깐, 전화 좀 받고 말할게. “내일 모레? 그럼 13일? 그날 시간 비울게. 영화? 오케이.” 전화 끊었으니까 인터뷰 다시 하자구. T기획사 일 안 받아도 아는 사람 통해서는 일 들어와. 무슨 영화냐고? 몰라. 그런 거. 우린 그냥 가.

그게 엑스트라 인생이야.

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